아주 오래 전 스피커 개발자들에게는 ‘고효율’이 최대의 화두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강력한 앰프들이 없었으므로 고작 몇 와트의 소출력 앰프로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절실했다. 따라서 스피커는 무척 컸고 중고역에 ‘혼’과 같은 증폭 구조가, 저역에서도 앞뒤로 복잡하게 돌아 나오는 음향 구조가 널리 유행했다. 따라서 유닛의 직접 음보다는 음향구조에 기인하는 고유음이 발생하게 마련이고 이 고유음이 스피커의 음색을 좌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왜곡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당시의 개발자들은 이런 고유음을 없애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쪽보다는 사람들의 귀에 좋게 어필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TR 앰프가 출현하면서 100W, 200W 식의 강력한 앰프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스피커 설계자들은 더 이상 효율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고효율의 스피커들은 TR 앰프의 잔류 잡음을 더 크게 들리게 할 뿐. 스피커의 음향 구조는 점점 간단해졌으며 크기도 작아졌다. 왜곡은 많이 줄어든 반면 대역은 오히려 넓어졌다. 모든 부담을 파워 앰프 쪽으로 돌리고 나서 홀가분해진 설계자들은 이제 ‘위상’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다. 가상동축형 구조나 프론트 배플에 경사를 주어 고역과 저역의 위상을 맞추는 것이 시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설계자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단순히 음색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소리가 나오는 위치라든가 펼쳐지는 모습, 즉 음장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추구하다보니 인클로저는 떨지 못 하게 단단하고 무거워졌고 스피커의 폭은 스피커의 폭은 반사를 피하기 위해 좁아졌으며 대구경 우퍼들은 여러 개의 작은 우퍼들로 분할되어 키가 커졌다. 인클로저가 자체의 울림을 갖는 것은 청감상으로 부드러움이나 안락함과 같은 좋은 점이 있더라도 소리의 순도를 저해하는 ‘악’으로 터부시되었고 유닛의 직접음에 의존한, 유닛의 성능을 최대한 부각하는 설계 경향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근 스피커의 설계는 고성능 유닛의 개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좋은 진동판이 갖추어야 할 가벼우면서 강하고 또한 댐핑이 좋아야 한다는 조건은 지금까지 서로 상충되는 난제로 여겨져 왔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종이나 실크에서 백스트렌이나 폴리카보네이트 같은 고분자 화합물, 케블러나 탄소섬유 또는 특수한 발포제, 알루미늄이나 마그네슘, 티타늄 같은 금속들이나 그 산화물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계 가공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현대의 가공기술은 기조의 재질과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단단한 재질을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얇게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한 코팅을 거쳐 가벼우면서도 강하고 댐핑이 좋다는 서로 상충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진동판을 얻게 해 준 것이다. 이 새로운 기술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아큐톤(틸 앤 파트너). 그들은 사파이어의 경도와 동일한 세라믹 재질을 진동판에 도입하더니 결국은 다이아몬드를 진동판의 재질로 등록해 놓았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물질 중 가장 경도가 높은 것이므로 사실상 유닛의 진동판에서 재질에 관해서는 끝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유닛에서 더 발전할 여지는 진동판이 아닌 자기회로나 발성 구조의 변화밖에.

최신 하이엔드 스피커들은 이런 첨단 유닛 덕분에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들이 앞다투어 아큐톤의 유닛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사용하는 유닛들, 최소한 진동판의 재질이 점점 비슷해지므로 재미가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피커 시스템의 측면에서는 이런 고성능 유닛을 어떤 네트워크와 인클로저로 통합하는가에 따라 충분히 다른 소리를 내고 설계자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취향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변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기대를 해도 좋다. 루멘화이트, 마르텐, 아발론, 카르마에서 출시된 초신 하이엔드 스피커들은 유닛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소리는 모두 다르다.

이번에 리뷰하는 스피커는 독일의 아이소폰의 아라바. 아이소폰이라고 하면 애호가들은 옛날 동축형 유닛이나 풀레인지 유닛들을 연상할 것이다. 맞다. 1930년대 고효율을 모토로 할 때부터 스피커를 만들던 그 아이소폰이 맞다. 다만 그 이름은 한 동안 OEM에 치중하고 카오디오용 유닛들을 만드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에 70년대와 80년대에 애호가들 사이에서 잊혀졌을 뿐이다. 아이소폰은 1990년대가 되며 그동안 충분히 쌓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정용 하이엔드 스피커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상을 담아 낸 최고급 기종이 아라바이다. 아라바는 모두 아큐톤 유닛을 사용하고 있는데 3/4인치 다이아몬드 트위터, 점박이 7인치 세라믹 미드 유닛 하나, 그리고 9인치 세라믹 우퍼를 세 발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 유닛들을 일렬로 늘어놓은 덕분에 키는 훌쩍 자라서 134cm. 인클로저는 깊이가 56cm로 무척 깊은 편인데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 인클로저는 합판과 MDF를 여러 겹 덧대어 만들었는데 MDF에는 슬릿을 주어 모래(석영)을 꽉 채워 놓아 단단하며 댐핑이 좋다. 세게 두드려 보아도 울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불룩한 곡면의 인클로저를 뒤쪽으로 따라 가보면 루멘화이트처럼 슬릿 형태의 덕트가 있고 바이와이어링 지원 스피커 단자와 고역 저역 보정용 저퍼가 있다.

이 스피커의 하드웨어 특징 중 가장 큰 것은 네트워크에 있다. 카탈로그를 보고 크게 놀랐는데 저역과 중역 사이는 무려 12차 필터를 쓰고 있다고 한다. 보통의 메이커들은 옥타브(주파수가 2배가 되는 간격)당 -6dB의 기울기를 갖는 간단한 1차 네트워크나 -12dB을 갖는 2차 네트워크를 많이 쓴다. 차수가 높다고 하더라도 3차나 4차 정도이고 그 이상을 본 기억은 없다. 고차 네트워크를 쓸수록 컷오프의 경사가 급해지므로 유닛 간에 소리가 중첩되는 대역이 좁아지는 장점은 분명히 있지만, 부품의 개수가 많아 손실이 커지고 유닛간 위상의 차이가 커지고 컷오프 주위의 주파수 특성에 굴곡이 심해지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어떤 스피커 설계자도 감히 12차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라바의 중저역 네트워크는 12차 네트워크이라고 하면서도 경사는 옥타브당 -72dB이라고 하지 않고 -50dB 이상이라고만 표기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단순하게 캐패시터나 인덕터를 쭉 늘어놓아 차수와 경사만 중가시킨 것(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이 아니라, 고차 네트워크의 단점을 개선하는 별도의 회로가 추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고차의 네트워크를 사용함에도 89dB/W라는 높은 음압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세 주 가까이 다양한 앰프로 아라바를 울려 보았다. 스피커의 가격이 5,500만원 정도라고 하니 그에 걸맞는 하이엔드 앰프로 울리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여건상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울려 볼 수밖에 없었다. 소스기기는 마크 레빈슨 37/360 세트로 고정. 앰프로는 멜로디의 아리에타로부터 패스 X2.5와 스텔라복스 PW1 조합, MBL 6010과 클라세 CA401까지. 물론 앰프의 구동력에 따라 저역의 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어느 것이나 확실한 수준 이상의 광대역감, 특히 대단한 스케일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울리기 어려운 편은 아니어서 출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앰프로도 충분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만 이 스피커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 내려면 아무래도 대출력에 섬세함을 겸비한 앰프가 필요할 듯.

MBL 6010과 클라세 CA401를 주로 들었다. 아라바의 저역은 실로 대단했다. 15인치 우퍼 한 발의 면적을 넘는 9인치 우퍼 세 발이 큰 진폭으로 움직이는 것은 귀로 느끼는 소리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쾌감. 이글스의 어쿠스틱 ‘호텔 캘리포니아’에 그토록 강력하고 깊은 저음이 숨어 있는 것은 처음 알았다. 에지 오/미네소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크의 ‘불새’는 게르기에프보다 얌전하다는 인상이었는데 무시무시하게 여겨질 정도. 다이아몬드 트위터의 위력도 상당하다. 청중 한 명 한 명의 박수 소리가 섬세하게 구분되며 스피커 주위로 넓게 포진한다. 일본의 모 평론가가 ‘포동포동한 손바닥에서 나는 박수소리’ 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고 피식 웃은 일이 있는데 아라바를 들으니 포동포동한 손바닥과 마른 손바닥이 청중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을 알았다. 다만 대충 자리를 잡고 들어서인지 카잘스의 넓은 공간이 포화되어 버린 느낌. 스피커의 각도나 위치에 따라 음이 크게 변화하는 만큼 대략 이틀 정도 소리를 들어가며 소리를 조금 소극적으로 만들어 스피커 사이로, 그리고 뒤쪽으로 가두도록 위치를 조정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라바 주위의 스피커들이 모두 구석으로 밀려났고 텅 빈 리스닝 공간 중앙에 아라바 두 대만 우뚝 솟아 있게 되었다. 스피커 아래를 단단한 돌로 고정하고 스파이크 아래에 흑단을 받치든가 하는 식의 트위킹도 효과가 있었다. 제대로 세팅을 한 뒤 오랜만에 많은 음악을 들었다. 특히 좋았던 음반은 엔리코 라바의 (Label Bleu) 장난스러운 연주와 특이한 악기구성이 재미있어서 즐겨 듣던 음반인데, 아라바를 통해 듣고는 재미가 아닌 감동을 받았다. 다른 스피커에서는 곱기만 한 트럼펫 소리가 약간의 파열음과 함께 아주 섬세하게 재생된다. 거기에 들릴 듯 말 듯 했던 전자 기타가 확실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과해서 소화불량 느낌의 낮은 저역의 베이스음이 스피커 주위로 시원하게 펼쳐지던 것. 열 번쯤 듣고 나서 다른 스피커로 들어보니 여간해서 감흥이 일지 않는다.

한편 아라바의 뒷면에는 3단계씩 저역과 고역을 보정할 수 있는 점퍼가 있는데 인터 케이블을 바꾸거나 스피커 케이블을 바꾸는 것처럼 매우 효과적이다. 케이블에 따른 소리의 개선은 민감한 스피커가 주는 잔재미. 이 잔재미에 빠져 들어 케이블들을 점점 더 나은 것으로 바꾸다보니 아르젠토의 흰 뱀들, 세레니티 마스터 레퍼런스로 통일되었다. 후에 요르마의 프라임 바이와이어링 스피커를 매달았더니 케이블 값만 4,000만원을 훨씬 넘어섰다. 필자로서는 처음 겪는 호사. 하지만 좋은 스피커라면 응당히 대우를 해주면 해줄수록 더 좋은 감동으로 보답한다. 후에 다른 장소에서 그리폰의 미라지와 안틸레온 시그너처, 역시 아르젠토 세레니티 마스터 레퍼런스 케이블들로 아라바를 울려 본 후 이를 확신했다.

출처 : 월간오디오 2007년 5월호   글쓴이 : 최상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