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회현동에 갔다가 장당 2천원씩 하는 중고 LP들을 보게 되었다. 모두 미국반으로, 이른바 원판이라고 해서 한때 가슴 설레게 했던 음반들이다. 팝이나 록이 대부분이고, 쓸 만한 레퍼토리는 별로 없었지만 일단 가격적인 메리트가 대단해서 쭈그리고 앉아 골라봤다. 캡틴 앤 테닐, 칼리 사이먼, 실즈 앤 크로프트, 캔사스, 닐 다이아몬드... 만일 CD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레퍼토리가 수중에 들어왔다. 고르고 나서도 이런 음반을 얼마나 듣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우리 세대는 어차피 원판 노이로제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내용물이 나빠도, 반질이 좋고, 자켓이 깨끗하면 일단 끌린다. 정 안 듣게 되면 누구 줘버리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물론 비틀즈나 스톤즈, 딜런 등은 3만원 정도 줘야 하고, 좀 귀하다 싶은 것은 5만원을 호가하는 게 요즘 중고 LP 시장의 현실이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대략 3만원을 기준으로 레퍼토리의 품질이 갈린다. CD는 2만원 내외로 노 오픈을 구할 수 있는데 반해, LP는 중고이면서 더 가격이 비싸니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든다.

사실 LP, SACD, CD 등의 포맷을 경쟁시키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LP가 된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소리를 만들고자 하면, CD가 훨씬 유리하다. 애호가들은 원반 노이로제 못지 않게 LP 콤플렉스도 있어서, 무조건 LP가 CD의 음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기준을 들이대면 그렇지만, 어느 세계나 마찬가지로 이 역시 그리 간단치 않다.

개인적으로 좀 쓸 만한 LP 플레이어는 뭐가 있을까 한번 조사해봤다. LP12나 토렌스 520과 같은 과거의 명기들은 중고로 200만원 안팎이면 구한다. MC 바늘을 장착하고, 고만고만한 포노 앰프를 연결하면 3~400만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소리가 이 가격대의 중고 CD 플레이어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최근에 이 제품들의 소리를 들어보니, 역시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역폭이 좁고, 해상도가 떨어지며, 구태의연한 소리가 나왔다. 매칭 시스템에 따라 매력 있는 소리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요즘 만들어지는 턴테이블들의 수준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럼 최근 턴테이블 중에 값싸고 좋은 제품은 뭐가 있을까 둘러봤다. 어쿠스틱 솔리드, 노팅검 아날로그, 롤프 켈시, 바이거 등이 떠올랐는데, 톤암을 부착할 경우 500만원 이상을 넘어야 제 소리가 나왔다. 거기에 MC 바늘을 붙이고, 제대로 된 포노 앰프를 연결해야 하는데, 문제는 포노 앰프에 있다. 저가중엔 눈에 띠는 녀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B.A.T.나 램, ASR 등의 제품이 떠오르는데, 문제는 모두 800만원 이상이나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다.

좋다. 이렇게 구성해서 LP를 한다고 치자. 문제는 레퍼토리다. 굳이 초반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쓸 만한 중고 LP는 앞서 말한대로 3만원 이상 하는데, 이것은 어차피 록이나 팝에 국한된다. 2천원짜리로 좋은 소리를 얻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차피 레퍼토리가 뻔해서 자주 듣게 되지는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 재즈로 가보자. 3만원대에서 블루 노트나 프리스티지를 만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상태가 제대로 된 음반이라고 하면 10만원을 훌쩍 넘긴다. 용산 어느 가게에선 꽤 근사한 블루 노트반(盤)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가격표가 물경 25만원 ! 참, 너무 한다 싶었다. 재발매한 중량반이 있지 않느냐 어필할 수도 있다. 당연히 LP를 한다면 이런 음반에 손을 대라고 추천하고 싶다. 다만, 좀 쓸 만한 것은 5만원 정도 한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어떤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왕에 좋은 아날로그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런 음반을 손에 넣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몇 장 집으면 100만원이 넘는 계산서가 나온다. 입맛이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역시 재즈 LP 콜렉터로 소문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콜렉션이란 일종의 놀이와 같다. 자기 나름대로 규칙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번 하루키지만, 단언컨데 그도 10만원이 넘는 LP는 손대지 않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싸다고 처음에 2천원짜리 원반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더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이래서 화제의 다시금 초점은 CD로 돌아온다. 정말 무궁무진하게 레퍼토리가 펼쳐져 있다. LP에 손대는 순간 왜 CD가 귀중한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LP에 버금가는 수준의 CD 플레이어를 손에 넣는다면, 굳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씩 음반을 고르고, 반질을 확인하고, 자켓을 청소하는 노가다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런 것도 재미라면 재미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취미라는 것도 너무 깊으면 화를 불러일으킨다. 적당한 선에서 끝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코드에서 나온 레드 레퍼런스 CDP를 소개한 적이 있다. 정말 이 기기를 듣고 감격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굳이 LP에 목을 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이 좋았다. 단순히 기계적인 정교함과 객관적인 스펙의 훌륭함만 갖춘 제품이 아니었다. 음 하나하나에 정감이 넘치고, 감촉이 좋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뭔가를 담고 있었다. 기본적인 해상도나 와이드 레인지는 물론이고,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음을 재미있고, 매력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굳이 LP쪽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고 단언할 만하다.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가격이 문제다. 3천만원을 훌쩍 넘어서는 기기인지라, 단품 CDP로는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어지간한 분리형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꼭 분리형이 뛰어나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혹시 이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하면서 비슷한 퀄리티의 제품이 없을까 기웃거렸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코드의 마음의 움직였는지, 그 ‘주니어' 기종이 탄생했다. 이른바 레드 스탠다드.

그럼 레퍼런스와 스탠다드는 무엇이 다른가? 가격적으로는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격차가 나지만, 음도 그런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해상도나 분석력 등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으로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말하자면 레퍼런스가 감촉이 좋고, 온기가 넘치는 클래식에 적당하다면, 스탠다드는 약간 경질이지만 활기와 기백이 충만한 록이나 재즈에 어울린다. 필자의 취향으로 치면, 잘 알겠지만 스탠다드쪽이다.

그렇다고 스탠다드에서 나오는 클래식이 엉성하고 딱딱하냐면 천만의 말씀이다. 여성 연주자의 감미롭고, 애절한 음에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철두철미 완벽성을 지향하는 남성 연주자들의 음에는 통하는 바가 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여성 보컬에서 섹시함이 부족한 정도. 이렇게 쓰면 레퍼런스와 스탠다드의 차이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렸으리라 본다. 지금부터 좀 딱딱한 스펙 이야기를 할까 한다.

우선 외관을 보자. 레퍼런스와 스탠다드 공히 똑같은 샤시를 채용하고 있다. 모델명만 제외하면 완벽히 똑같다. 개인적으로 이 디자인은 여태 만들어진 모든 CDP 중에 최고라고 생각한다. 원래 코드를 주재하는 존 프랭스(John Franks)는 대단한 심미안의 소유자로, 건축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감각을 최대한 디자인에 반영했는데, 코드의 앰프들이 보여주는 네 개의 기둥과 세련된 마감 처리는 하루 아침에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CDP에 이르러 이런 감각이 만개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보는 맛이 대단하다. 특히 45도 각도로 누운 트레이 뚜껑의 위치는 이 제품 디자인의 백미. 어찌 보면 두꺼비 입 같기도 해서, 뚜껑을 열고 CD를 넣은 다음 닫고 나면, 꼭 두꺼비가 뭘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잘 씹고, 잘 넘겨라. 그래서 노래 한번 제대로 해라,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마감 처리도 놀라워서, 손으로 만지면 그 두툼하고, 단호한 질감이 과연 공업 제품만이 내는 미적 센스를 느끼게 한다. 과거의 명기들이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디자인이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엔 억대를 호가하는 제품 중에도 마음을 끄는 디자인이 드물다. 그런 면에서 본 기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충분히 찬미하고 또 만끽할 만하다. 한데 본 기의 CD 트랜스포트부는 뚜껑만 알루미늄이 아니다. 실은 메커니즘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담고 있다. 진동이나 외부 신호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고 보면, 네 개의 기둥 역시 마찬가지. 일종의 공중 부양처럼 본체를 허공에 띄어놓지 않았는가. 참고로 트랜스포트의 메커니즘은 필립스의 CD Pro 2.

본 기는 기본적으로 DAC 64와 CD 트랜스포트를 한 몸체 안에 담은 것을 컨셉으로 삼고 있다. 샘플 주파수는 44.1KHz. 그러나 64비트 DSP 코어와 1024 탭 디지털 WTA 필터를 동원해 높은 수준의 해상력과 다이내미즘을 실현했다. 특히 CD 트랜스포트부와 DAC 부간의 전송에 신경을 써서, 이를 연결하는 케이블을 완벽하게 실드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전달된 신호가 DAC 64에서 얻어진 기술로 DA 컨버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기의 제일 중요한 기술은 RAM 버퍼 기술이라 하겠다. 이는 모든 데이터를 받아들인 후 재타이밍해서 송출하는 것으로, 지터가 없는 작동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트랙을 넘기거나 할 때 약간의 딜레이 타임이 있지만, 이는 절대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애꿎은 리모콘을 바닥에 쾅쾅 내리칠 필요는 없다.

이 CD 플레이어의 또 다른 장점은 별도의 디지털 입력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AES나 옵티컬을 이용해 외부의 트랜스포트를 연결할 수 있는바. 그럴 경우 DAC 64의 DA 컨버팅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원래 CDP의 음질이라는 것은, 트랜스포트에 따라 그 성격이 많이 좌우되므로, 본 기를 구입한다면 재미삼아 또 다른 트랜스포트를 연결할 필요도 있다. 촉감이 좋거나 반대로 강직한 음을 만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워낙 잘난 형을 두게 되면, 상대적으로 동생이 손해를 본다. 우리 나라의 오디오 애호가들의 기질상, 모 아니면 도의 성격이 짙어서, 이왕 구입하는 것이라면 동급 최고를 고른다, 라는 태도가 강하다. 그런 면에서 스탠다드의 앞날이 험난하기도 하지만, 이 기기는 이 기기대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시청 리포트에서는 그 장점이 소상하게 밝혀질 것이다.

이번 시청에 동원한 기기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다질 앰프 세트를 중심으로, 스피커는 엘락의 FS 609-XP1와 윌슨 오디오의 시스템 8이 사용되었다. 참고로 시청한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루돌프 제르킨 & 레너드 번스타인 & 뉴욕 필

-카산드라 윌슨 "Love Is Blindness"

-그레이트풀 데드 "Crazy Finger"

-존 콜트레인 "Bakai"

베토벤은, 매우 절제되고 사려 깊은 제르킨의 연주에 탄복하게 된다. 악단과의 거리나 위치 등이 명확하고, 무대 밖으로 펼쳐지는 사운드의 스케일은 본 기의 기본기가 얼마나 탄탄한지 짐작하게 한다. 배음도 잘 갖춰져 있어, 그랜드 피아노의 사이즈를 그려낼 수 있다. 특히 제르킨이 정신 없이 피아노를 연타할 때의 기세가 압권이어서, 다른 생각을 접고 긴장해서 음에 몰두하게 만든다.

카산드라는, 기본적으로 여성미에 호소하는 가수는 아니다. 오히려 당찬 여장부의 성격이 강해, 남성 못지 않은 파워와 카리스마가 넘친다. 이 곡에서는 일부러 힘을 뺀 듯, 나른하게 노래하지만 음 하나하나에 흡인력이 강해 듣는 이를 마구 끌어당긴다. 이 곡 특유의 주술적인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어진다. 바닥을 둥둥둥 두드리는 플로워 탐의 존재감이 발군이다.

필자는 데드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최근에 리마스터링 CD를 구한 덕분에 자주 듣고 있다. 어딘가 코가 맹맹한 듯한 보컬에 생경한 레게 리듬, 그리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악단의 연주까지 얼핏 들으면 별 특징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본 기로 재생되면 세심한 부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히 포착하면서 전체의 앙상블을 절묘하게 표현해, 멤버 전체가 일체감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이나 표정이 잘 드러난다. 데드로서는 여흥의 기분으로 레게 리듬을 채택했지만, 그 맛이 보통이 아니어서 역시 데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콜트레인의 곡은, 이른바 3관 편성이다. 테너 색스, 트럼펫, 바리톤 색스가 프런트 라인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3관이 경쟁하듯 펼치는 화음이 재미있다. 또 리듬 섹션의 실력도 대단해서 드럼의 손놀림은 현란하기만 하고, 더블 베이스의 라인은 끊임없이 부유한다. 무엇보다 젊고 싱싱한 콜트레인의 블로잉은, 100마일짜리 강속구를 씽씽 던져대는 젊은 날의 랜디 존슨이나 로저 클레멘스를 연상케 할 만큼 속이 시원하다.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음악을 녹음할 때 대부분의 멤버들이 20대였다. 이런 패기만만한 음을 시간의 간극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 정확하게 재생하는 데에서 분명 본 기가 갖는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만큼은 LP 콤플렉스를 잠시 잊고, CD의 음에 한껏 빠지고 싶어진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CD의 음을 제대로 만들어놓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시스템 운용이기 때문이다.